분류 전체보기278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아름다운 관계 [박남준]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날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부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서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 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 2021. 10. 5. 종이접기 [최금진] 종이접기 [최금진] 이 길에는 순서와 법칙이 있어요 나중에 당신은 종이 속에 감춰진 무수한 길들을 이해하게 되죠 백지가 숨겨놓은 진실을요 집중력을 발휘할 때만 나무와 숲이 보여요 나무와 숲은 종이들의 영혼이 묻힌 곳이죠 종이를 접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이르는 거리를 당신 손에 갖게 되죠 우리가 길을 벗어나 형상에 이르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우리의 뇌는 활짝 열려 선분과 선분으로 이어지고 완성품은 아니지만 비로소 달을 보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생기는 거죠 외울 필요 없어요, 종이가 제 몸을 펼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신이 가보지 않은 더 많은 길이 종이 안에 묻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무와 숲에 눈이 내리면 백지의 들판이 펼쳐지고 세상에서 .. 2021. 10. 5. '밥을 딴다'라는 말 [문성해]연밥 '밥을 딴다'라는 말 [문성해] 연밥 물속에서 군불로 밥을 짓던 어머니가 한 그릇 두 그릇 허공에 밥을 올리신다 커다랗고 붉은 손바닥이 감싸올린 저 밥을 태초에 따던 하얀 손이여 태초에 벌판에서 벼이삭을 따던 여인네들 입속에 따뜻하게 고인 말도 이 '밥을 딴다'라는 말 까치가 고욤을 따듯 다람쥐가 도토리를 따듯 이 말은 밥이 밥에 더 가까워지는 말 털 숭숭 난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온 말 태초에 붉은 벌판에서 이삭을 감싼 따순 손바닥 두개여 혓바닥을 앞니에 씹듯이 떼어내며 '딴다'라는 말을 입속에 버무리던 이여 그는 일찍이 말을 지을 줄 아는 시인이 아니었을까 붉은 연꽃이 연밥을 허공에 싸안아 올리는 심정으로 태초에 밥 지은 솥을 머리에 이고 들판으로 들어가던 아낙이여 그이는 오소리보다 곰보다 큰 .. 2021. 10. 4. 발치(拔齒) [이문재] 발치(拔齒) [이문재] 어머니라고 하면 너무 멀어 보이고 엄마 하면 버릇없어 보여서 입속으로 어무이 입안에서만 엄니 일찌감치 보험 들어놓고도 몇년 몇달을 뭉그적거리다가 죽염 양치로 버텨보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어금니 뽑으러 가는 날 평생 이 아파하시던 우리 어무이 생각 앞니까지 다 빠진 채로 홀로 저승 가셨는데 행여 저승에서도 잇몸으로 드시나 마취 풀리고 피 멈추고 부기 다 가라앉았는데도 나는 자꾸 내가 싫어져서 저무는 북서쪽 하늘 올려다 보면서 없는 어금니 꽉 깨물면서 엄니 -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 내 나이 스무살 때 나도 이젠 성인이 되었으니 어머니와 형에게 존대를 해야겠다 결심을 했다. 엄마, 이랬어 저랬어,하다가 어머니,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려니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형.. 2021. 10. 4. 이전 1 ··· 65 66 67 68 69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