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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신스 [송종규] 히야신스 [송종규] 그러므로 모든 서사는 안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서사도 안전하지 않다 모든 부류의 사물은 결국 서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의 생애 역시 서사 아닌 것이 없다 그것은 실타래처럼 얽혀있거나 뜨거운 웅덩이처럼 함몰되어 있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히야신스나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기술하길 원한다면 꽃이나 사람의 생애는 곧,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진다 당신의 문장은 날렵하거나 기발하기도 하지만 당신이 만약 시인이라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하려하지 말 것, 그 남자의 구부정한 등이 한권의 서사인 것처럼 훌쩍거리며 국물 마시는 당신도 결국 한 권의 서사이다 젖은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나 페트병도 알고 보면 글씨들 빼곡한 한 권의 책 히야신스는 눈물처럼 맑은 문장이다 구름이 느리게 한 생.. 2021. 10. 6.
쓸쓸한 위로 [구수영] 쓸쓸한 위로 [구수영] 오후 네시, 뒷목을 끌어당기는 피로가 이슥하다 잘 볶아진 원두로 내린 드립커피나 커피머신에서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설탕과 커피와 프리마의 황금비율이 만든 종이컵 커피의 치명적인 매력을 아는지, 순서지를 뽑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곧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수레 하나 종이컵 커피를 마시던 아버지 입가에 묻어나던 안도의 미소가 땀을 흘리다 주름진 혈관마다 빠르게 도는 블랙 수액 위태롭고 쓸쓸하지만 반짝 피어오르던 백원짜리 동전 세 개가 만든 위로 혹시 당신이 또렷한 목소리로 그 커피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여러 개의 해악을 반나절쯤 나열한다 해도 오후 네시는 그렇다 손에 쥔 꼬깃한 순서지를 던지고 화살기도보다 빠른 달달한 6온스 종이 커피에 기대 이 어둔 터널을 .. 2021. 10. 6.
다시 안개극장 [하두자] 다시 안개극장 [하두자] 또 다시 너야, 나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으면서, 건조한 노면 위를 스 멀거리며 춤을 추면서 피어오르고 있어. 함부로 뒹굴지 않았지, 그러 니까 소리 없이 스며드는 방식도 때론 괜찮아 흘러갈 뿐이야. 이런 날 은 목을 빼고 네 안부를 묻고 싶어 우리가 한 때 다정했던 걸 너만 알 고 있으니까 느긋하게 갈비뼈를 만지듯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지 한 올 한 올 풀어내느라 한 잠도 잘 수 없는 스웨터처럼. 이대로 지워도 괜찮다고 속삭이지, 그런데 그 밤을 힘껏 밀치면 이제 신음 자욱한 기 억으로만 남아 있어 우리는 명징하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은밀 함이 없어, 달아날 수 없는 네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가는지. 휜 등을 보이는 그 어스름이 깊고 처연하게 얼마만큼 우리의 심장을 지웠는지 .. 2021. 10. 5.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연희] 자주 틀리는 맞춤법 [한연희]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힌다 나는 현명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 마 언니야 던지지 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나, 새는 물컵에게나, 쭈그려 앉은 개에게나, 길 한복판에서 내게. 너는 왜 늘 네 멋대로니? 곧 바뀔 거라고 믿은 빨강은 멈췄다. 행인들이 그냥 건너가버렸다. 언니가 틀렸다. 나는 운이 많은 아이니까. 셋만 세면 언니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나는 숫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언니가 뒤돌아봤다. 내가 알고 있던 언니는 없었다. 언니야 괘찬지마 언니야 도라오지 마 어떡게 어떻해 멈추지 마 건너편 간판엔 각종 찌개 팜니다 어름있읍니다 나.. 2021.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