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훈장 [김수우]

by joofe 2021. 10. 10.

훈장 [김수우]

 

 

 

 

 

이번 생은 수천 생을 바쳐 받아낸 훈장입니다

아무렇게나 달아도 달각달각

떨리며 풍경風磬 소리를 냅니다

진창을 건너온 수천 얼굴이 맴을 돕니다

 

내가 녹색 바다를 마시던 삼엽충이었음을 압니다

고생대 적막을 떠돌던 홀씨 시절을 기억합니다

어두운 동굴에 닿던 구석기 초생달이 선명합니다

호루스의 눈과 자주 마주치던 이집트 노예였습니다

화산이 가라앉고 바다가 산이 되어도

모든 날에 내 주소는 지금, 여기,

당신이었습니다

 

쉽게 칠한 에나멜처럼 반짝이지 않습니다

시간의 꽃가루를 털어내면

구리빛 노을이 드러나는 훈장

이제 경전이 되었습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일렁이는 당신 그림자

녹처럼 묻어나는 무시무시한 내 심장, 거미줄 총총합니다

 

 

, , 대책 없는 무지와 가난과 슬픔으로 꿰어낸

안데스 소금기가 배인 이 훈장

한때 내 어머니였던, 언젠가 나의 어머니가 될

당신, 그 쓸쓸함에게 달아주고 싶습니다

 

          - 계간 "시와 시학", 2021년 여름호

 

   

 

​* 일생을 자식을 위해 손발이 마르고 닳도록 오직 희생을 감당해낸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구리빛 노을이 드러나는 훈장 하나로 달아드릴 순 없을 텐데

당신의 그 쓸쓸함에게 달아주어야 한다니

달아주는 내가 오히려 미안함이 가득하고

그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내 생의 경전이 되어준 어머니의 사랑은 다음 생에서도 반드시 이어졌으면 한다.

달아드리는 내 손길에도 안데스의 소금내음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내리사랑의 훈장에는 녹냄새와 바다내음이 어마무지하다.

지금, 여기 그 냄새가.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녘 [김남조]  (2) 2021.10.11
밥 [황규관]  (6) 2021.10.10
결혼의 가족사 [하종오]  (0) 2021.10.09
뒷편 [천양희]  (4) 2021.10.09
가리봉동 61년 소띠 마귀순 씨 [박제영]  (4) 202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