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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밥 [황규관]

by joofe 2021. 10. 10.

밥 [황규관]

 

 

 

 

이게 다 밥 때문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가 왜소해졌기 때문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참 맑은 하늘을 보며

해방이란 폭발인지 초월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내가 내 맥을 짚어보았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그리운 동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우리를 영영 떠날지도 모르지만

아들아, 밥은 그냥 뜨거운 거다

더럽거나 존엄하거나, 유상이든 무상이든

밥을 뜰 때 다른 시간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

정신도 영혼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게 다 밥 때문이다

더 먹어라,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덜어주는 건

연민이나 희생이 아니다

밥은 사유재산이 아니니

내 몸을 푹 떠서 네 앞에 놓을 뿐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나무 아래서 걸어 나오니

아직도 수평선이 붉게 젖어 있다

 

            - 스미다, 김수우 엮음, 애지, 2016 

 

 

 

 

 

* 평생 삼시세끼를 먹었으니 그 대부분은 밥이었을 게다.

때로 국수를, 때로 수제비를, 때로 감자를 삶아 먹었겠지만

밥만큼은 아니었을 것.

고봉밥을 퍼준 부모의 사랑이 무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게다.

오백년 수령을 지닌 나무가 지켜보았다면 조상대대로

부모는 자식에게 밥을 멕이며 살았을 게 틀림없다.

나 또한 자식을 보면 무심코 나오는 말이 "밥 먹었니?"라는 말이다.

사랑을 주고 싶어서 튀어나온 말이다.

한 숟갈 더 떠주거나

아예 내 몸까지 푹 떠서 줄 만큼 밥은 부모의 사랑이다.

아들아, 너도 밥이 될 날이 올 것이지만 밥이 되어주는 것은 숭고한 사랑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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