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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by joofe 2021. 10. 11.

그대로 멈춰랏!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계단이 사라졌다

놀라지 않는다 계단이란 종종 사라지곤 하니까

 

계단 위의 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태연한 이곳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다른 곳에서

집이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유리창 밖으로 부풀어 오르던 불빛도, 옥상에서 펄럭이던 세월도, 시간을 붙잡아둔 몇 개의 액자도 모두 사라졌는데

 

눈이란 믿을 게 못되지

 

분명

이 근처에 계단이 놓여 있을 거야 저 높이에 창문이 매달려 있을 거야 그 위에 붉을 지붕이 있을 거야

 

희망은 순식간에 한 채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여기가 몇번째 집인지 묻지 않고

 

잠든다

얼마전까지 황무지였고 잠시 집이었으며

다시 허허벌판이 될 이곳에서

 

           -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2014 

 

 

 

 

 

* 평생 이사를 한번도 하지 않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집에서 사는 이는 몇이나 될까.

나같은 경우는 가장이 되고나서 열댓번을 이사했고

이제는 이사가 지겨워 그만 해야겠다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

경주에서 첫직장을 다닐 때는 단칸 방에 부엌 하나, 그리고 화장실은 대문옆에 붙은 월세집에서 살았다.

이후 아홉평 아파트에 입주해서 살고는 직장 따라 평택으로 아산으로 천안으로 옮겨다녔다.

전세는 이년 계약이므로 본의 아니게 이사를 다녔다.

어느 곳인지는 대충 알지만 몇층이었는지 몇호였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사라지는 것들이 점점 많아져서 이제는 그런가보다 싶지만 아쉬운 것들이 좀 있다.

광화문 거리는 은행나무가 많아서 좋았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서울고 앞의 인왕다방도 참 많이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분명 이 근처인데......'라는 갸우뚱만 남았다.

인사동 다사랑의 대추차도 참 맛있었는데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요즘 같은 코로나시국에는 단골집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순식간에 건물이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순식간에 갸우뚱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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