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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감상

낡은 소파 혹은 곡선의 기억 [송종규]

by joofe 2021. 10. 12.

낡은 소파 혹은 곡선의 기억 [송종규]

 

 

 

 

내가 처음 밟았던 문턱의 둥근 부분

구름이 떠메고 가는 구름의 이력서

저물던 바닷가 전화벨 소리, 당신

 

시시콜콜 인간의 것들 다 기억하는 나를

아주 많은 날짜들지난 후에 지울 수 있으리라 짐작하기도 하지만

당신이라 의심되는 

내 안에 저장된 너무 많은 겹겹 당신

 

그러나 모든 것은 안개, 환유, 공공연한 비밀, 거대한 나무, 당신

 

꽃 핀 들판이나

낙타의 느린 보폭, 허술한 회계장부 같은 내 낡은 문장에

혹, 당신을 새겨 넣어도 좋을는지

 

그러나 당신에 대한 기억은 쥐라기 공원, 초인종, 내 몸이 기억하는 

난해한 곡선 몇 개

 

혹, 당신

언제 내 곁을 스쳐 간 적이나 있었는지, 혹 언젠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 있었는지

 

아주 객관적인 햇빛이나 쇠락한 왕조의 뜰 같기도 한 삶에

당신이라 의심되는, 내 높고 낮은 기억의 소용돌이를 

첨부해도 좋을는지

 

혹······ 당신,

 

            -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2015

 

 

 

 

* 오래전에 같이 직장을 다니던 후배직원에게 전화를 했다.

오부장, 잘 지내지.

- 어 웬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응, 요즘 뭐하나 싶어서.

- 네, 고령에 와서 환경 관련한 일을 하죠.

오부장이 전자재료 전공했잖아? 전장회사에 올 생각 없는가?

어? 제 전공을 어찌 알고 계세요? 기억력이 좋으세요.

쓸데없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하나를 끄집어냈는데 퍽이나 신기해 한다.

그래 쓸데없이 기억한건데 쓸데가 있었네.

정말 오래된 낡은 소파에 앉은 기분이랄까.

기억속에 두서없이 저장된 것들이 언젠가 하나씩 둘씩 빠져나와 나를 고문할지도 모른다.

좋았던 일이, 나빴던 일이 교차로에서 순서대로 오고 갈 테니까.

레떼의 강물을 퍼마시면 말짱하게 저장고의 문을 닫아버릴 수 있을라나.

엠십육 소총의 최대사거리가 2,653미터라는 건 왜 기억하고 있는지...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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