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감상

막막한 시간2 [김승희]

by joofe 2021. 10. 19.

 

막막한 시간2 [김승희]

 

 

 

 

지하수가 지하에 있기를 거부하는 시간이 오면

지하수가 땅으로 올라오고

도로는 무너지고 문명의 금자탑은 스러지고

가두리 양식장은 바다로 끈을 뚫고 나아가고

지상의 것들은 속절없이 허물어져 싱크홀 속으로 삼켜지고

이 보다 더 큰 혁명이 있는가

엄마도 당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는 향기가 난다오

댁은 누구셔요?

너는 누구냐

병실 창밖으로 나비가 날아가니

아, 나비······나는 너를 안다

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딸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로즈 마리 이리 온

두 마리 조롱조롱한 강아지에 손을 내밀면서도 

나만 못알아보는 순간의

너무나도 초롱초롱한 저 눈빛

로즈마리가 자식이요 해가 달이요 병상 모니터가 은하수요

전주가 경성이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옹기종기 모인 가족들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번개가 쳐서 스마트 폰이 떨어지면 흰 연기가 나고

우체국 배달이 다 끊어지고

가뭄에 땅이 갈라지는데 저기 비 온다 소내기, 빨래 걷어라

장독 뚜껑 닫아라 나물 소쿠리 치워라 허공에 두 팔을

흔들며 로즈마리 밥 줘라 로즈마리를 

찾는 

엄마 당신은 나의 엄마인데 였는데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 키도 크고 눈에서 향기가 난다오

나의엄마였다니까요

이 아귀들아 로즈마리 밥 줘

 

                  - 시로여는세상, 2015년 여름호

 

 

 

 

* 해가 늘 동쪽에서 뜨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전방향이 바뀌면 

해가 서쪽에서 뜰 개연성이 있다.

총명하고 멀쩡했던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딸을 보고도 누구세요?

내 딸은 아라비안 자스민인데요.

한 얘기 또하고 또하고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런 때가 되면 전과 후가 완전히 딴판인 세상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 몸도 마음같지 않은데 정신까지도 오락가락하면 삶의 질은 떨어진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그냥 막막해질 것 같다.

'시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권혁웅]  (2) 2021.10.20
번역자 [장혜령]  (0) 2021.10.20
견디다 [천양희]  (2) 2021.10.19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2) 2021.10.16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그림 [윤제림]  (4) 2021.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