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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꽃 [이상문] 파꽃 [이상문] 고작, 혼자서는 넓은 안마당이 쓸쓸했을까 사랑채 뜰 위에 슬그머니 들어선 대파 한 뿌리 봄내 모른 척했더니 불쑥 꽃을 피웠다 낯선 풍경이 절경을 이룬 벼랑에 간절함이 세운 집 한 채 떠밀려본 사람들은 안다 밀릴수록 사소한 것에도 목숨 거는 억척이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하는 법인데 가끔 튀어 오르는 낙숫물에도 손을 벌렸을 저 가난이 어떻게 텅 빈 속을 감추고 일가를 지켰을까 모질지 못해 떠돌았을 생인데 파꽃보다 많은 말꽃을 피우는 툇마루에 제 몸 다 비워 핀 노인들 멀리 있는 아이들도 불러오고 꺾어진 시절도 끄집어내는 파안일소破顔一笑, 아린 바람 냄새로 풀풀 흩어지던 웃음들이 집 안에 든 미물도 함부로 내치는 게 아니라는 오래된 이야기로 다시 저녁 바람벽에 못을 박는다 서로를 다독거리다 바.. 2022. 5. 14.
마음을 들여다본다 [채호기] 마음을 들여다본다 [채호기] 마음을 들여다본다. 눈으로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 발을 내밀어 디뎌본다. 그런데 너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누가 보지 않을까? 길 아닌 곳으로 방향을 잡아 파고든다. 풀숲을 헤쳐 나간다. 나무 뒤에도 숨고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멀리 내다본다. 마음을 밟고 있는 몸 끝으로 삶의 비밀보다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것들을 떨어뜨린다. 너는 중얼거림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깨어난다. -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문학동네, 2019 서곡(序曲)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 진눈깨비 속에서 옆으로 질질 발을 끌며 다가오는 그 무엇에 나 는 멈칫한다. 다가올 일의 단편. 허물어지는 벽. 눈 없는 그 무엇. 단단한. 이빨의 얼굴! 홀로인 벽. 아.. 2022. 5. 14.
오래된 의자 [신미균] 오래된 의자 [신미균] 생각이 삐그덕 움직이자 쇠못 하나가 겨드랑이에서 쑥 빠져 나옵니다 망치로 빠져나온 쇠못을 박아 넣자 등받이가 왼쪽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어렸을 때 동생과 그 위에서 마구 뛰고 싸우고 던지고 온갖 까탈을 부려도 묵묵히 다 받아준 의자 언제고 필요하면 아무 생각없이 털썩 앉곤 했는데 기울어진 의자를 바라보니 어깨가 시큰거리며 풍 맞아 기우뚱해진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오래 됐다고 망치로 이리저리 내리치다 안 되면 버리려고 하다니 이번엔 아무리 돈이 들어도 의자를 제대로 고쳐야겠습니다 - 맨홀과 토마토케첩, 천년의 시작, 2003 * 오랫동안 의지하며 살았던 것은 어른들의 사랑이었다. 내리사랑이라고 값없이 우리에게 주기만 했던 어른들. 시간은 유한해서 이제는 그분들이 계시지 않다. 그분들이 .. 2022. 5. 14.
오후의 사과나무 [김길녀 1964~2021] ㅡ여름 오후의 사과나무 [김길녀 1964~2021] ㅡ여름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여자들 골짜기에 둥지 튼 여자네 사과밭 안 누옥에 모였네 그들에겐 고향, 몇 몇에겐 타향이었다가 고향이 되어버린 두꺼운 도시와의 인연 조금은 울다가 더 크게 웃고 있는 마흔 밖의 여자들 숨겨 놓은 열쇠와 열어둔 다락방 빈집 고요를 허락한 여자네 집 글자락으로 생을 파먹는 여자들 시간을 만지는 손길이 따뜻하다 누군가는 아주 길게 누군가는 조금 짧게 어느 계절 잡지라는 공간에 세 들어 문장이란 이름 빌려 길거나 짧았던 하루 다정한 안부로 풀어내리라 사과나무 잎사귀들 천천히 그려가는 달콤한 향기의 지도 여름비 내리는 둥근 지붕 위에 작은 깃발을 꽂고 왔다 - 웹진 2018년 1월호 * 사과꽃이 피는 계절이다. 누군가 사과꽃을 주워들고.. 2022.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