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약장수들 [김형수] 약장수들 [김형수] 나는 어릴 때 약장수 굿을 좋아했다 손에는 하모니카, 등에는 큰북, 발뒤축에는 심벌즈를 치는 끈 달린 신을 신고 보여요? 안 보여요 들려요? 잘 안 들려요 부딪치는 발길에 밀려드는 파도에 애들은 가라! 감기 든 날 오후에 이불 속에 묻혀서도 어른들 가랑이를 끼어 다녔다 그리움은 어둠 속 별처럼 허기진 가슴에 빛을 뿌린다 약장수가 오면, 약장수가 와서 또 굿판을 벌이면 팡팡 쏟아지는 말씀의 포탄들 새떼도 놀라고 낮달도 아득히 머리 위를 떠가지만 석양이면 장터는 멸망한 왕조처럼 빈터만 남는다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 것을 약장수 떠들던 제품도 효능도 썰물에 씻겨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생각나요? 아무 생각 안 나요 그래도 세상은 장터로 변하여 정치도 시도 약장수들 판이다 - 가끔 이.. 2022. 5. 5. 배춧국 [이상문] 배춧국 [이상문] 어머니는 삼시 세 끼 배춧국을 끓이셨다 어린 내 손 가락보다 굵은 멸치가 둥둥 떠오르던 된장 배춧국 가 난이 어떤 것인지 모르던 나는 어머니의 고단한 하루 도 모르는 채 반찬 투정을 했다 구수하고 시원한 국 맛이 어때서 그러냐고 큰 소리 내지 않고 고개를 숙이 셨다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로 정말 시원하다 정말 구수하다를 연발하며 늦어도 한참 뒤늦은 맞장 구를 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가 이제 늙었다며 자 기는 아직도 고등어자반이 최고란다 정말 나만 늙은 것인지 모르지만 배춧국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의 안부 가 궁금하고 불러보고 싶어 전화를 하는 것이다. 어머 니 어떠세요 - 사랑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달아실, 2019 * 국밥집에 가면 첫숟갈에 국물맛을 보게 된다. 국물에서 .. 2022. 5. 5. 가짜 [허형만] 가짜 [허형만] 스님, 김남조 시인이 누님이시라면서요 옆자리에 앉은 오탁번 시인이 장난을 거신다 글쎄, 그게, 중이란 게 나이를 알지 못해서 큰 스님이 딴 청을 피우시다가 한 말씀 하시는데 나는 중 옷만 입었지 가짜 중이야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 정수리가 뻥 뚫리는 듯했다 저리 큰 스님이 가짜 중이시라니, 그럼 나는? 가짜 교수? 가짜 시인? 어쩐지 요즘 육십 세월이 헐겁더라니 그날 밤 나는 오탁번 시인과 왕십리에서 대취했다 - 그늘이라는 말, 시안, 2010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씀하신 스님이 계셨다. 교수는 교수요, 시인은 시인인데 가짜가 워낙 판을 치는 세상이라 진짜들이 내가 가짜일까?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신신애가 부른 '세상은 요지경'처럼 여.. 2022. 5. 5. 백조의 호수 [강영은] 백조의 호수 [강영은] 뜨거운 후라이팬 바닥을 휘젓는다 참깨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뒤꿈치를 드는 참깨, 무릎 구부리는 참깨, 한 다리 를 직각으로 펴는 참깨, 깨금발 군무를 시작한 참깨들이 〈백조의 호수〉무용수 같다 여기저기 작은 무용수들이 튄다 한 발이 올라가면 한 발 세상이 튄다 깨금발 세상이 튄다 발가락이 누렇게 타들어간다 뒤꿈치가 발갛게 벗겨 진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깨금발 세상을 들어 올리느라 일주일에 천 켤레의 눈물을 버렸다지? 천 켤레의 리듬, 천 켤레의 눈물이 허공을 휘젓는다 휘휘 돌아가는 깨금발 세상이 어지러워 나도 모르 게 한 발을 든다 왼발 오른발,번갈아 들며 리듬을 탄다 허공을 높이 찰수록 허공을 향한 몰입은 고소해지 는 걸까 두 발로 허공을 걷어차 본다 허공을 걷어차는 고난도의 연.. 2022. 5. 5.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