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메주 [서하] 메주 [서하] 날더러 못생겼대요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누구나 조금씩은 못생긴 부분들 감추며 살지만 적어도 난 겉 다르고 속 다르지는 않아요 긴 콩밭 이랑 사이 불쑥불쑥 말 걸어오는 잡풀 하나 아는 체하지 않은 고집 때문에 절간의 목어처럼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야 한대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동안 틈새 쩍쩍 갈라지는 일들 많지만 때로는 훈훈한 바람 만나 속 열어 보이며 적당히 자신을 익힐 줄도 알지요 봄을 준비하는 사람은 봄보다 먼저 발효되어야 한대요 - 아주 작은 아침, 시안, 2010 * 요즘 단어를 축약해서 쓰는 게 유행이지만 우리 어릴 때에도 우스갯소리로 줄임말이 있었다. 못생겼다는 표현을 옥떨메!라고 했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는 말이다. 얼마나 못생겼길래... 다른 표현으로는 무주구천동이.. 2022. 4. 25. 대니 보이 [박은정] 대니 보이 [박은정] 우박이 내렸다 늑대의 얼굴을 그릴 때마다 모르는 당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자신의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 내게 어울리는 장소를 갖고 싶을 뿐이야 가령 슬픈 모두에게 밤인사를 할 수 있는 곳 나는 전기뱀장어처럼 이생의 상처를 사랑하지 이곳에선 누구든지 절망할 수 있단다 기억 속 뒤축을 버리고 잠복한 음악 오늘을 지나던 행인의 이름을 아일랜드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은 먼 곳에 있는자 풍금을 연주하던 동무들은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병에 든 유서 따윈 밀려오지 않는 곳 파도의 적막을 견딘 새들의 이명을 아일랜드라 부른다 새벽 세시의 자흔이 깊어진다 눈을 감고 피던 자목련과 창을 뛰어넘던 시선들 오직 순정한 혼혈의 자세로 한 방향으로만 울던 몸의 흔적을 아일랜드라 부른다 누구도 내게 .. 2022. 4. 25. 이방인 [장혜령] 이방인 [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볼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엔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길이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2022. 4. 24. 첫사랑이 아니래도 그카네 [박제영] 첫사랑이 아니래도 그카네 [박제영] 띵똥! 띵똥! 누구세요 택뱁니다 혹시 니 귀순이 아녀? 워매 봉창이 정미소집 김봉창 맞지? 고향 서산서 둘째라면 서러울 부잣집 아들 김봉창이 가 리봉동까지 와서 택배 일을 하고 있다는 게 귀순 씨는 도 무지 믿기지 않았는데, 서산서 젤로 이뻤던 마귀순이 가리봉동 반지하방에 산 다는 게 봉창 씨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는데, 뭔 택배길래 함흥차사여, 뒤늦게 따라 나온 가만덕 씨, 보리쌀 훔쳐 먹다 들킨 새앙쥐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 을 번갈아 보다가 모른 체 하는 것인데, 뭔 택배래? 누가 보냈데? 큰애가 겨울 옷 좀 보낸다카더니 그날 이후 가만덕 씨 툭하면 귀순 씨를 놀려먹는 것인데, 첫사랑 봉창이 오늘은 안 왔나? 봉창이 아니래도 그카네, 첫사랑 아니래도 그카네 귀신.. 2022. 4. 21.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