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뿌옇게, 또렷하게 [한영옥] 뿌옇게, 또렷하게 [한영옥] 벌써 다시 초겨울인 모양인데 어제 일도 전생인 듯 뿌옇게 뭉글거리는 통에 이생의 뭉뚝한 손바닥을 벽에다 문지르다 바닥에다 문지르다 마른가슴에다 거칠게 문지르네 울컥하게 받아치며 쏟아지는 것, 생각지도 않게 보들보들한 기억 무더기가 푸짐하네 찬찬히 목도리로 둘러보니 따스하게 몇 겹이네 손잡아주던 이들이 웬만큼은 있었다는 것이네 말할 것도 없이 또렷한 당신이 제일 고맙네 벌써 다시 초겨울인 모양인데 모진 눈보라 속으로 내몰았던, 알게 모르게 내몰았던 이들이 뿌옇게 번져오네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또 또렷해지네 내생으로 늦은 눈물 굽이쳐 흘러가기 전 당신에게 조복(調伏)해야 할 도리, 빳빳하게 두르고 모진 겨울 터널, 두려움 버리고 뚫어가겠네 -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문학동네,.. 2022. 5. 10. 콘크리트 산책법 [조온윤] 콘크리트 산책법 [조온윤] 종점까지 걸었다 간혹 쓰러지는 사람이 있었다 쓰러지기 위해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저기 저 우뚝한 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지기 위해 축조되지는 않았듯이 인간을 흙으로 빚는 건 마음을 뭉그러뜨려도 모종의 손길들로 하여금 물성을 회복하게 하였기 때문 손목에 생긴 실금 위로 펴 바르는 회반죽이 뜨듯한 입김을 맞으며 천천히 굳어가는 동안 한낮이 어깨를 흔들어도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죽은 듯이 보내던 인고의 시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참아보아도 정말로 죽어 있는 시간은 없었다 먼 훗날의 복원을 위해 흙 속에 묻어두기로 한 꿈은 있었다 나보다 더 오래 서 있을 수 있었던 복층 건물이 미래를 지향하는 설계를 꿈꾸며허물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부서지기 위해 지어지고 지어지기 위해 부서지는 모.. 2022. 5. 8. 손님 접대 [이순남] 손님 접대 [이순남] 산 밑 수무골에 출장을 갔다 축사 주인 어디 가고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나를 반긴다 음전한 황소들은 예를 다하는 듯 하나둘 일어서더니 맑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새로 설치한 물통의 개수를 확인하고 사진도 찍고 소 숫자도 세어보고 나오는 길이 뭔가 아쉽다 얼굴이 넓적하고 어깨가 우람한 소들이 듬직한 장정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느 전생에 저들과 둘러앉아 탁배기 한잔을 했을 듯도 싶다 축사를 나서니 강아지가 차까지 따라 나오고 나가는 내내 소들이 눈길을 떼지 않는다 주인 없는 축사 짐승들이 손님 접대를 한다 - 버릇처럼 그리운 것, 달아실, 2021 * 띄엄띄엄 있는 시골의 집들과 축사에 가면 주인이 아는 경우가 아닐 경우엔 잘 접대 받기가 어렵다. 대개는 뜨악한 표정으로 뭘 노리.. 2022. 5. 7. 주인 [김수우] 주인 [김수우] 무청시래기, 햇살을 꼬며 빈 암자를 지킨다 주둥이 풀린 양파자루, 금간 대야, 홀로 핀 수선화를 지 킨다 옹색한 부처를 이해하는 보살보다 기적을 기대하지 않 는 주지보다 퍼질러 앉아 당당한 것들, 산사의 고요를 알처럼 품었다 흘러오던 물소리, 흘러가며 봇도랑을 지킨다 며칠 째 바람을 물고 당기던 산벚나무, 종일 고무슬리퍼 를 지키고 있다 번갯불 가지고 다닌다는 금강역사가 따로 없다 - 몰락경전, 실천문학사, 2016 * 우리는 모두가 내가 주인이요,라며 갑 행세를 한다. 실은 을인데 갑으로 아는 것이다. 무청시래기를 널고 양파를 꺼내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만지고 바라보고 돌본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주인이다. 주인인줄도 모르고 감히 무청시래기를 무시하고 양파를 난도질하고 물소리를 알아듣.. 2022. 5. 5.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