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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혀 [나희덕] 상처 입은 혀 [나희덕] 너는 혀가 아프구나, 어디선가 아득히 정신을 놓을 때 자기도 모르게 깨문 것이 혀였다니 아, 너의 말이 많이 아프구나 무의식중에라도 하고 싶었던, 그러나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가버린, 그 말을 이제야 듣게 되는구나 고단한 날이면 내 혀에도 혓바늘처럼 돋던 그 말이 오늘은 화살로 돌아와 박히는구나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음을 지나야 얼마나 뼈저린 비참을 지나야 우리는 서로의 혀에 대해 이해하게 될까 혀의 뿌리와 맞닿은 목젖에서는 작고 검고 둥글고 고요한 목구멍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이 말이 아니다 독백도 대화도 될 수 없는 것 비명이나 신음, 또는 주문이나 기도에 가까운 것 혀와 입술 대신 눈이 젖은 말을 흘려보내는 밤 손이 마른 말을 만지며 부스럭거리는 밤 너에게 .. 2022. 3. 8.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조용미]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조용미] 빈소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 것 같다 며칠간 그곳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읽지 못할 긴 편지를 쓴 것도 같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천천히 멱목을 덮었다 지금 내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길고 따뜻했던 손가락을 느끼며 잡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으며 우리의 다짐은 얼마나 위태로웠으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얼 마나 초라했는지 푸르고 창백하고 연약한 이곳에서 당신과 나를 위해 만들어진 짧은 세계를 의심하느라 나는 아직 혼자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 마음은 변화무쌍하다. 물론 금방금방 변하는 건 아니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멱목을 덮을만 하면 마음은 다르게 된다. 봄이 여름이 되고.. 2022. 3. 6.
상수리나무 [안현미] 상수리나무 [안현미]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굴리며 혼자 놀고 있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상수리나무만 홀로 남아 오래전 먼저 저를 안아버렸던 여자의 젖가슴을 기억해 줄 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날 그곳에 갔지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상수리나무를 만나러 갔.. 2022. 3. 6.
미안한 일 [김사인] ... 미안한 일 [김사인]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 요즘 유행하는 단어중에 "라떼는 말이야~"가 있다. 젊은 사람들이 윗세대를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라떼는~' 세대들은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에 뭐든지 열심히 배워서 일터에서 힘들고 무겁고 더러운 일을 해가며 적은 돈 받아다 알뜰살뜰 돈을 모아 자식을 키우던 세대다. 지금 젊은 세대는 그 여축에 힘입어 비교적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란 세대다. 그런데도 눈을 부라리며 상체 내밀어 뭐라고뭐라고 하고 있다. '라떼는~.. 2022.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