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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 연가 [문성해] 뒤통수 연가 [문성해]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과 눈 마주치지 못하고 괜히 개하고나 눈 마주치다 그 개가 그르릉거리는 소리라도 하면 얼른 시선을 땅바닥으로 내리깐다 나는 점점 마주 오는 사람이나 마주 오는 개보다는 오히려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가 이리 편안해지니 나는 이제 안전하고 무고하리라 아침 공원에서 뒤통수들과 안면을 트고 뒤통수들을 품평하고 뒤통수들과 사랑을 한 지 여러달 이제 낯익은 뒤통수라도 만나면 달려가서 뒤통수를 치고 싶어진다 연신 삐딱거리다가 끄덕거리는 것을 보니 그도 나를 알아본 모양 내 뒤통수가 괜히 가렵거나 스멀거린다면 내 것도 누군가를 알아보았단 증거 그때는 조용히 뒤통수의 일은 뒤통수에게 맡긴 채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내 뒤통수는 이제 많은 것들과 실실거릴 것이다 이것이 뒤태를.. 2021. 12. 24.
소금 [안채영] 소금 [안채영] 짠맛들, 물을 마시게 하는 이유라면 봄날의 기슭을 버티고 있는 나무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고 있는 중이다 먼 소식을 찾듯 뿌리들 짭잘한 이유들 쪽으로 뻗어 있었을 것이다 겨울나무들의 단식斷食 혹은 절식絶食 같지만 소금 같은 눈송이들로 바짝 절여진 겨울이었을 것이다 껍질을 벗겨 맛을 보면 쓴맛 단맛 또는 향긋한 맛이 나는 것이 맹맹한 식성이었다는 증거겠지만 기슭이 녹고 몸 털고 꽃피워 짠물 빼는 중이다 언젠가 지하철 계단 참에서 산 두 줄의 김밥이 유독 짭잘했던 이유도 다 기슭을 버틴 겨울의 뒷맛이었기 때문이다 - 생의 전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간 오후, 달아실, 2020 *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꼰대라느니 라떼나 찾는다느니 자신들의 발목을 잡거나 길을 열어주지 않는.. 2021. 12. 24.
빈말 [황순애] 빈말 [황순애] 약값이 얼마지? 내가 보낼게. 아니에요. 됐어요, 언니. 형부가 우리 아이 대부님이신데요. 그래 정말 괜찮겠니? 그럼 고맙게 받을게. 어느날 그 사촌동생이 술을 먹고 정색을 하고 전화를 했다. 언니 왜 그리 눈치가 없어요? 언니가 그동안 약값을 안 주어서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알아요? 언니가 알아서 돈을 보냈어야죠. 그래 난 눈치가 없다. 그동안 약값을 몇 만 원 떼먹은 거 같다. 떼먹고 싶어서 떼먹은 게 아니라, 자꾸 괜찮다고 하길래, 하도 괜찮다고 하길래 형부가 대부님이라는 말까지 하길래 그게 진심인 줄 알고 약값을 한두 번 보내지 않은 적이 있다.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믿으면 그야말로 눈치가 무진장 없거나 염치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헛산 것 같은 생각, .. 2021. 12. 24.
신을 창조해놓고도 [김수우] 신을 창조해놓고도 [김수우] 청개구리 두마리 내 방에 찾아든 날 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죽음은 거미를 닮아 어디서나 집을 짓는 중이다 어쩌자고 저 어린 것들 여기 닿았나 화성 탐사를 하듯 망망대해 우주를 건너 내 방으로 들어선 두마리 초록 등이 선득했다 순수한 초록은 얼마나 날카로운가 들어온 데로 나가겠지, 외면했다 무서웠다 상추도 뜯다가 개밥도 주다가 하루를 지내고 까무라친 한 놈을 모서리에서 발견했다 빗물에 내놓았다 엉금거렸다 괜히 사진첩 들추던 이틀째 한 놈을 찾았다 빗물에 내놓아도 등이 뻣뻣하다 당장 신을 만들었다 신이 필요했다 모래알만 한 기적이 간절했다 기도했다 살려주세요 방 안은 수분 한방울 없는 광막한 사하라 우물을 숨기지 못한 내 영혼이 바삭거린다 죽음은 원래 알몸이어서 어디서나 집을 허.. 2021.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