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8 소라게 [황주경] 소라게 [황주경] 집도 절도 없던 나였다 오랫동안 발품을 팔아 고르고 고른 석양이 아름다운 바닷가 집이었다 파도가 들려주는 노랫소리 들으며 혼자 살기 딱 좋은 집이라며 행복해했다 어느 날 좀 잘나가는 친구집을 다녀와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발을 쭉 펼 수 있게 친구라도 데려올 수 있게 가구라도 하나 놓을 수 있게 조금 더 넓은 집을 소원했다 재바르게 발을 움직였지만 생각처럼 더 큰 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때부터 노을을 바라보던 나선의 계단도 싫증났고 끊이지 않는 노랫소리도 짜증났다 허영이 심한 허기를 불러왔다 폭식이 불온한 영혼을 달래게 되었다 천장에 머리가 부딪쳤고 창으로 어깨가 비집고 나왔다 끝내 나는 문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으며 결국, 집을 이고 다니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 - 울산작가 20.. 2022. 1. 2. 바람이 불면 승부역*으로 간다 [송문희] 바람이 불면 승부역*으로 간다 [송문희] 아무것도 없어도 어쩌다 찾아가도 그대로였으면 세상은 너무 변하고 우리들에겐 변하지 않는 무엇이 필요해 그게 너였으면 홀로 휑한 바람을 만나고 싶어 무작정 차표를 끊는 그 순간 마음은 벌써 이곳에 닿아 있지 작은 대합실 작은 꽃밭 소실점을 향하여 뻗어가는 선로 보면 볼수록 청아한 풍경들 어서와 앉았다 가라 손짓하는 작은 다리 먼 데 집들도 고요를 품고 있네 소소소 마음을 울리는 바람의 잔물결 그대 품처럼 떨리는 하루 “하늘도 세 평이요 / 꽃밭도 세평이나” 세 평을 노래한 옛 시인의 시비 절경은 이걸로 충분해 * 승부역(承富驛) :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에 있는 영동선 열차역 - 고흐의 마을, 달아실, 2020 * 富를 잇는 역이니 왠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잘.. 2022. 1. 2.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신미나]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신미나]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수壽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겠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열두 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꾸겠네 목화꽃 송이, 송이 세 송이 콧등을 스치며 높은 곳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아도 좋겠네 너와 나, 꿈길의 먼 이부자리까지 솜을 틀자 이불이 짧아 드러난 발목을 다 덮지 못해도 꿈속에서는 미래의 지붕까지 덮고도 남겠지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철 지난 이불은 개켜 두고 일단 종로로 가자 종로에 가서 베개를 사자 -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 2021 * 어릴 때, 우리집은 솜틀집을 했다. .. 2021. 12. 30. 종포마을에 가서 [안채영] 종포마을에 가서 [안채영] 달밤, 종포*만에 가서 흰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캄캄한 갯벌 사이로 이쪽 마음에도 들지 않은 그렇다고 저쪽 마음에도 들지 않은 물길이 이리저리 휘어지며 흐른 다. 때가 되어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살엔, 몰살沒殺 물 목들이 어느 물때에도 들지도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것 보 았다 그곳에서 곡선의 마음을 배웠다 저 환한 물줄기는 달月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고 이쪽도 저쪽도 들르지 않는 마른 물줄기가 있다면 달의 틈이 벌어지고 그 틈으로 흰 물이 새어나올 때까지 기다 려야 할 것이다 입구가 없다는 건 사방으로 뻗어 있는 마음이라고 탁하 게 들어왔다 맑게 나가는 흰 물이지만, 맑게 나가는 물에 색깔의 편협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물의 마음이란 새벽과 저녁나절의 밝기일 뿐, 저.. 2021. 12. 30. 이전 1 ··· 42 43 44 45 46 47 48 ··· 7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