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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나 마타타 [여태천] 하쿠나 마타타 [여태천] 어느 날 문득, 옆집 사는 사람이 손을 잡고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사람이 스와힐리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뉴스 진행자가 화면 밖으로 기어 나와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하나마나한 소리로 어느 날 문득 외계 생물체가 되어 지구에 도착해 부패한 정치에 분통을 터뜨리며 명절날 전을 부치며 허구한 날 빈속에다 뭔가를 쑤셔 넣으며 이게 다는 아니겠지 그럴 수가 있나, 하고 반복하며 돌아갈 날을 기다리지 하염없이 방아를 찧고 또 찧고 그 힘으로 우주가 돌아가는 거라며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어느 날 문득 외계 생물체로 남아 생을 마감하지 눈 내리는 산과 비온 뒤 돋는 들판의 풀들을 보지도 못하고 슬픔의 소화기관처럼 이웃도 가족도 잊.. 2021. 12. 30.
원경 [이혜미] 원경 [이혜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 2021. 12. 27.
압해도 [서효인] 압해도 [서효인] 아침에 이모부가 누운 채 돌아가셨다는 소식 있었 다. 섬에는 다리가 놓였고 바다를 누르던 앞발도 서 럽게 단단하던 갯벌도 천천히 몸을 돌리던 철선도 사라진다. 영구차가 다리를 건넌다. 섬사람이 없는 섬에서 연기가 올라온다. 바다가 다리 밑에서 조용 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모부는 배 농장을 하던 땅 과 놀던 땅 모두를 농협 조합장 선거에 갈아 넣었다. 이모부는 즙처럼 누워 쓸쓸히 편했고 압해는 바다를 꽉 누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모는 꽉 눌린 생물이 되 어 압, 압, 울음을 찾는다. 웃는 것일지도. 그녀의 표 정이 바다를 압도하고 있었다. -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 * 압해도에는 핫누님이 사신다. 목포가는 길에 일부러 압해도로 돌아가면서 혹시나 하고 전화드렸다가 하필 그날 손님.. 2021. 12. 27.
종소리 [송문희] 종소리 [송문희] 외할머니의 옛날 옛적에는 때죽나무가 살았네 몇 알의 열매로 물고기들 떼죽음 당한다는 그 무서운 이야기 때죽나무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잠이 달아나버렸네 그런 독하고 무서운 나무를 만났네 계곡을 걷다가 나무가 방금 놓친 꽃이 바위를 하얗게 덮어 꽃섬이 되었네 캘리그라피 밑그림으로 그려 넣은 때죽나무는 그리움의 배경이 되고 나는 종소리를 듣네 그 고요한 잎 그늘의 오후를 잊지 못하네 토막토막 난 기억은 얼기설기 이어져도 순결한 꽃을 피우고 독한 열매를 맺는 때죽나무의 이면은, 그대의 이면 같아서 - 고흐의 마을, 달아실, 2020 * 시 제목을 때죽나무로 하지 않고 종소리로 한 것은 꽃이 작은 종처럼 아래를 향해 피어있기 때문일 게다. 순결하고 겸손한 꽃임에도 조금은 과장되게 무서운 독을 가진.. 2021.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