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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이규리]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를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노랑이나 목숨은 입구가 단단하여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 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 * 세계 인구가 78억. 등록되지 않은 인구까지 합치면 80억 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이 엄청나게 먹어대고 엄청나게 소비를 해대니 바다에는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고 바이러스는 시시각각 진화하여 지구를 괴롭히고 있다. 전쟁과 더러운 공기와 자연재해와도 싸우기 힘든데 바이러스까지 창궐하니 한 생이 산다는 게 기적이라고 봐야겠다. 입 벌리.. 2021. 12. 16.
모란의 시간 [김승희] 모란의 시간 [김승희]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세상 모두 숨 죽여 너도 없고 나도 없고 멀리 모란의 숨결이 불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한밤중에 홀로 경련으로 몸이 출렁이는 시간 무슨 시간 어느 시간 뭐 이런 시간 뭐 이런 절벽 뭐 이런 벼락 죽을 수도 있는 시간 죽어가는 어떤 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숨을 죽이고 꿈틀거리는 심장 홀로 모란만 남는 그런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지나가는 시간 모르는 숨결이 슬쩍 칼처럼 들어오는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모란이 핀 시간 무슨 시간 그런 시간 망할 놈의 모란이 뚜욱 떨어지는 시간​ -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 한밤중에 홀로 죽어가는 시간. 영혼은 육체의 고통을 안타까워할까. 숨이 멈추는 순간을 괴로.. 2021. 12. 16.
길순심 여사의 장판법석 [박승민] 길순심 여사의 장판법석 [박승민]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 하는 족족 엎어지는 박복도 있는기라, 그르이, 누군가의 업을 짊어지고 사는 기 한생이라. 업이라고 생각하믄 몬 살지만 복이라 생각하믄 다 산다. 지 놈이 딴 데 안 들러붙고 내한테 왔구나, 그래 생각하믄 또 살아진다 내는 말이다 평생 앉아본 적이 없는 짐승이다. 단풍놀이도 테레비에서 봤지, 송해 나오는 노래자랑도 식 당에서 설거지하며 귀로 봤다. 원망은 무신 원망이 있겠노. 그래 견디고 지나뿌면 다 잊히는 기라. 천당이 어데 있노? 니는 있드나! 그래도 태어난 고향은 한번 가보고 잡다. 백사장이 털어논 흰깨처럼 이뻤지…… 탈북자들이 영주장(場)에도 온다 카드만, 아이다, 그기도 욕심이다. 내가 영감이 있나 자식이 있나, 그 생각 하다가도 .. 2021. 12. 11.
길고 긴 낮과 밤 [임승유] 길고 긴 낮과 밤 [임승유] 우리가 사과를 많이 먹던 그해 겨울에 너는 긴 복도를 걸어와 내 방문을 열고 사과 먹을래 물어보곤 했다. 어느 날은 맛있는 걸로 먹을래 그냥 맛 으로 먹을래 그러길래 네가 주고 싶은 것으로 아무거나 줘 말해버렸고 오래 후회했다. 그날 사과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된 여러 가지 사과의 맛 과 종류에 대해, 다양한 표정과 억양으로 이야기를 나누 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20 * 사랑도 기술이 필요하고 대화도 기술이 필요하다. 먹을래?에 아니!라고 답하면 대화가 이어질 수 없다. 구체적으로 물어도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인은 과묵한 걸 좋아해서 의사표현을 감추는 편이다. 먹을래?에 됐슈!라고 답하면.. 2021.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