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78

훈장 [김수우] 훈장 [김수우] 이번 생은 수천 생을 바쳐 받아낸 훈장입니다 아무렇게나 달아도 달각달각 떨리며 풍경風磬 소리를 냅니다 진창을 건너온 수천 얼굴이 맴을 돕니다 내가 녹색 바다를 마시던 삼엽충이었음을 압니다 고생대 적막을 떠돌던 홀씨 시절을 기억합니다 어두운 동굴에 닿던 구석기 초생달이 선명합니다 호루스의 눈과 자주 마주치던 이집트 노예였습니다 화산이 가라앉고 바다가 산이 되어도 모든 날에 내 주소는 지금, 여기, 당신이었습니다 쉽게 칠한 에나멜처럼 반짝이지 않습니다 시간의 꽃가루를 털어내면 구리빛 노을이 드러나는 훈장 이제 경전이 되었습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일렁이는 당신 그림자 녹처럼 묻어나는 무시무시한 내 심장, 거미줄 총총합니다 긴, 긴, 대책 없는 무지와 가난과 슬픔으로 꿰어낸 안데스 소금기가 배.. 2021. 10. 10.
결혼의 가족사 [하종오] 결혼의 가족사 [하종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중매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 자식 밸 때마다 정말로 사랑했을까 자식 낳지 않을 때도 서로 더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밀고 당기느라 큼, 큼, 거리며 품을 주었을까 등을 돌렸을까 우리 부부는 연애결혼하여 자식들 낳았다 자식 밸 때마다 정말로 사랑했다 자식 낳지 않을 때도 서로 더 사랑하면서 마음을 밀고 당기느라 후, 후, 거리며 손을 맞잡기도 했다 발을 포개기도 했다 우리 아들은 중매결혼할까 우리 딸은 연애결혼할까 혼인 적령기에 접어들면서도 아직 배냇짓을 하며 어미하고 아비하고 깔깔, 깔깔, 거리면서 번갈아 마음을 밀고 당기는 아들 딸, 참사랑할 상대를 구하지 않는다 치사랑 내리사랑을 더 나누고 싶어서일까 - "시, 사랑에 빠지다", 현대문학 2009년 1월 * .. 2021. 10. 9.
뒷편 [천양희] 뒷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뒷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뒷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뒷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새들에게는 지옥이 없다, 한국시인회편, 2004 * 자주 가는 절에는 까만 기왓장에, 혹은 리본에 소원이 적혀져 있다. 대개는 가정이 행복해지길 빌거나 건강을 빌거나 자녀의 학업성취 등이 적혀져 있다. 성당에서야 기도를 하면 성모 마리아가 들어주거나 하느님이 들어줄 테니 굳이 적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저 뒷편에서 기도를 하거나 기왓장에 소원을 써놓는다고 생각해보라. 그 기도와 소원을 비는 일이 없었다면 나의 생에 지금의 곡선이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 2021. 10. 9.
가리봉동 61년 소띠 마귀순 씨 [박제영] 가리봉동 61년 소띠 마귀순 씨 [박제영] 아줌마, 8번에 갈비 2인분 추가요! 아줌마, 뭐해 9번에 냉면 네 그릇이요! 아줌마, 빨리 좀 닦아요 퇴근 안 할 거예요? 그놈의 아줌마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어서야 야간 식당 일을 겨우 끝낸 귀순 씨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배고파 밥 줘 남편은 오늘도 밥타령이다 여편네가 귀꾸녕이 막혔나 밥 좀 달라니까 에라 화상아 에라 만득아 차라리 귀신이나 되어서 저 만득일 잡아묵을까 싶다가도 불쌍한 저 만득이 내 없으면 또 어찌 살까 싶은 것이니 여자가 공부하면 팔자가 드센 법이다 귀순이 니는 대학 같은 건 꿈도 꾸지 말고 그저 남동생들 뒷바라지만 잘하 면 된다 쫄딱 망해먹은 아버지, 망할 놈의 유언, 그래도 아 버지는 아버지요 유언은 유언이라, 일찌감치 대.. 2021.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