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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형이 되기 위하여 [강신애] 사각형이 되기 위하여 [강신애] 사각의 방에 들어가 사각의 책상에서 사각의 잠을 잤다 일어나니 내 몸이 사각형이 되었다 볼록렌즈처럼 나를 통과하는 무엇이나 담던 고통의 한 정점을 향해 타들어가던 몸뚱이를 벗었다 날카롭게 모서리진 팔다리, 꼭지점으로 밀집해 들어가는 숨결의 팽팽한 긴장 둥글어지기 위해 눈빛조차 궁글려야 했지 둥글어지려는 내 안의 벽을 허물어야 해 여기서 나가면 공기가 나를 지하로 굴려버릴 거야 (둥근 것은 죄야) 사각형의 방에 빈틈없이 꼬옥 끼워지기 위해, 일렁이는 생각들을 거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창작과비평사, 2004 * 대학시절엔 자기 강의 시간에나 수업을 듣고 비는 시간은 잔디밭에 앉아있거나 써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층 써클실에서 학생회관 앞 광.. 2021. 10. 11.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분명 이 근처에 [유병록] 계단이 사라졌다 놀라지 않는다 계단이란 종종 사라지곤 하니까 곧 계단 위의 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태연한 이곳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다른 곳에서 집이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유리창 밖으로 부풀어 오르던 불빛도, 옥상에서 펄럭이던 세월도, 시간을 붙잡아둔 몇 개의 액자도 모두 사라졌는데 눈이란 믿을 게 못되지 분명 이 근처에 계단이 놓여 있을 거야 저 높이에 창문이 매달려 있을 거야 그 위에 붉을 지붕이 있을 거야 희망은 순식간에 한 채의 집을 짓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여기가 몇번째 집인지 묻지 않고 잠든다 얼마전까지 황무지였고 잠시 집이었으며 다시 허허벌판이 될 이곳에서 -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2014 * 평생 이사를 한번.. 2021. 10. 11.
서녘 [김남조] 서녘 [김남조] 사람아 아무려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 밑 더 파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 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 스미다, 김수우 엮음, 애지, 2016 * 서녘 하늘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 볼 수 없고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안타까워 할 일은 아니다. 시인이 그만한 세월을 버티어 오면서 단 한 마디, 뭐 어때!가 기승전결의 결말인 것이다. 뭐 어때? 살면서 별의별 일이 있지만 그 일이 이미 오천년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백년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앞으로 백년 뒤에도 일.. 2021. 10. 11.
밥 [황규관] 밥 [황규관] 이게 다 밥 때문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가 왜소해졌기 때문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참 맑은 하늘을 보며 해방이란 폭발인지 초월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내가 내 맥을 짚어보았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그리운 동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우리를 영영 떠날지도 모르지만 아들아, 밥은 그냥 뜨거운 거다 더럽거나 존엄하거나, 유상이든 무상이든 밥을 뜰 때 다른 시간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 정신도 영혼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게 다 밥 때문이다 더 먹어라,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덜어주는 건 연민이나 희생이 아니다 밥은 사유재산이 아니니 내 몸을 푹 떠서 네 앞에 놓을 뿐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나무 아래서 걸어 나오니 아직도 수평선이 붉게 젖어 있다 - 스미다, 김수우 엮음.. 2021.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