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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신용목] 대성당 [신용목] 서 있다.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손 흔들려고, 미리 끊어둔 표가 있는 것처럼 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 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미꽃처럼 해가 진다. 서 있다. 장미넝쿨처럼 노을이 번지고,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내 몸속에, 뭉쳐진 가 시들이 붉게 켜지면······ 이런 고백. 핏줄은 바람에 뽑혀 나뒹굴다 외진 웅덩이에 빠져버린 장 미넝쿨처럼 몸속에 던져져 있다, 어쩌면 종소리처럼.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장미꽃처럼 심장은 박혀 있다. 어쩌면 종처럼, 서 있을게. 장미 다발을 건네며······ 시간이 길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날의 우리는 추억이라는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겠지. 술병을 쓰러뜨리며, 여기는 스무 살 같아. 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아, 스무 살인 곳.. 2022. 3. 5.
테이블 [조용미] 테이블 [조용미] 이른 저녁을 먹는다 묵묵 어쩌다 여기 들어와 밥을 먹게 되었나 비술나무 세 그루 물끄러미 오래 밥 먹는 나를 바라본다 이곳은 넓고 환하고 테이블이 많다 비술나무가 나란히 서서 내려다보는 식사는 약간 목이 메인다 나는 밥을 먹고 비술나무는 가까이 옆에 있다 창은 나를 오래 상영한다 창밖의 나무는 세 그루 나는 한 사람 식당은 아주 밝고 지나치게 넓고 깨끗하다 이 식사는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 어쩌다 이 넓고 지나치게 많은 테이블 가운데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을까. 혼밥을 먹는데 비술나무 세 그루가 함께 해준다니 적막감에 숟가락 젓가락 소리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 둘러앉아 먹는 식사는 목이 메이지 않을텐데...... 어쩌다 적막 어쩌다 .. 2022. 3. 1.
불멸의 동명극장 [심재휘] 불멸의 동명극장 [심재휘] 글자를 배우기 전에 우리는 동명극장을 먼저 배웠지요 그러니까 극장 이름이 동명이 아니고요 나직하게 소리 내 부르면 나타나는 그 동명극장이요 택시부를 지나 양조장을 지나 천변이고요 글자도 아니어서 받아 적을 수 없는 그 동명극장이요 나지막하게 동명극장을 부르면 일곱살 몸이 되었다가 열다섯 몸도 되었다가 열아홉살 몸은 대관령을 넘고 또 넘지 못할 고개도 없이 살았는데요 오래 전에 폐업했다는 동명극장은요 부르지 않아도 이미 소리가 되는 그곳은요 동명도 아니고 극장도 아닌 불멸의 동명극장이에요 그냥 몸이 없는 몸이에요 내 곁인데 갈 수는 없어요 -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창비, 2022 * 어릴 때 우리집은 만화가게 겸 편의점이었다. 문에는 대동극장의 영화포스터가 붙여졌.. 2022. 3. 1.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어령]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어령] 하나님, 나는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촛불 하나도 올린 적이 없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별을 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별 사탕이나 혹은 풍선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렇게 높이 날아갈 수는 없습니다. 너무 얇아서 작은 바람에도 찢기고 마는 까닭입니다. 바람개비를 만들 수는 있어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보셨지요. 하나님 바람이 불 때를 기다리다가 풍선을 손에 든 채로 잠든 유원지의 아이들 말입니다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 그리고 저 .. 2022.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