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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고영민] 앵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버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 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 공손한 손, 창비, 2009 * 빨간 화이바를 쓴 여인, 앵두. 앵두에 관한 기억은 두가지다. 하나는 일천구백팔십사년 군복무 시절, 알파포대 마당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아마 유월말쯤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다 따가지고 나누어먹고 내꺼를 따로 봉지에 담아다 주었다. 피엑.. 2022. 2. 22.
역모 [전병석] 역모 [전병석] 내일이면 엄마는 퇴원한다 형제들이 모였다 엄마를 누가 모실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큰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양원에 모시자 밀랍처럼 마음들이 녹는다 그렇게 모의하고 있을 때 병원에 있던 작은 형수 전화가 숨 넘어간다 어머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며··· 퇴원 후를 걱정하던 바로 그 밤 자식들 역모를 눈치챘을까 서둘러 당신은 하늘길 떠나셨다 - 시와편견, 2021 겨울호 * 아픈 부모를 모신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대체로 긴 병에는 효자 없고 간병에도 효자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점점 맞벌이시대가 되어가고 있어 아픈 부모를 모실 시간과 여력이 없다. 그러니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부모세대를 모시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늙으면 스스로 간병을 해야할 게.. 2022. 2. 22.
차경借景 [박주하] 차경借景 [박주하] 마디 굵은 저 나무는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있으나 너른 들판에 선 듯 튼실해 보이지요 정원의 흙이 내심 속속들이 뿌리에 깊이 연루되어버린 곡절이랄까 뿌리가 흙인지 흙이 뿌리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세월이 허공으로 줄창 뻗어 나가 새들을 부르고 있으니 생은, 서로의 풍경을 앙물고 숨 쉬는 것 그대는 내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빌어온 가을 풍경이었나 봅니다 휘어지기 위하여 속을 비운 갈대를 꺾어놓고 외면했던 피가 돌지 않는 사연이랄까 내가 그대인지 그대가 나인지 헤아리기 분주했던 숨 막히는 그늘 속에선 아직도 저수지의 시간들이 처절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차가워진 저녁의 몸으로는 차마 그대를 안을 수 없었습니다 - 숨은 연못, 세계사, 2008 * 생은, 서로의 풍경을 앙물고 숨 쉬는 것.. 2022. 2. 18.
흰 꽃 [김수우] 흰 꽃 [김수우] 해운대 샛골목 쪽문 국숫집 퇴색한 신발장에 우묵우묵 구름들 모여 있다 빙하기에서 도착한 길이 낮은 문지방을 넘는 소리 안데스로 떠나는 길이 깨진 탁자를 미는 소리 그 옹글진 파문을 디디고 신발장 위 늙은 난에서 꽃이 피었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올리는 향불처럼 희디흰, 맨발들 사박사박, 다시 국수 같은 주술을 낳으시는지 짝사랑, 안녕하다 - 젯밥과 화분, 신생, 2011 * 꽃중에 흰꽃이 가장 예쁘다. 편견일까. 삼년전인가, 키우던 커피나무에서 채취한 커피콩을 싹 틔워 화분을 지인들에게 분양해 주었다. 커피꽃은 흰색이다. 꽃이 피었다고 문자를 주시다니요,이다. 약국안에서 잘 키운, 짝사랑 덕이다. 우리집에는 십일년생, 팔년생, 오년생, 이년생이 살고 있다. 십일년생은 해마다 팔십알.. 2022.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