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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태 [문성해] 뒤태 [문성해] 돗자리 파는 노점 영감님 뒤태가 꼭 김춘수 선생 같다 목이 기룸하고 어깨는 조붓하고 키는 중키인 뒤태에 예전에 돌아가신 선생 뒤태가 붙어 계신다 전봇대에 뭔가를 붙이는 사람 뒤에 돌아가신 삼촌이 있고 저수지에 앉아 있는 낚시꾼 뒤엔 큰아버지가 있다 마을 어귀 바위 위에도 어릴 때 잃어버린 백구의 등이 얹혀 있다 이들은 다 한통속으로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 봄날 오후의 언덕과 축사로 들어서는 염소들 등에도 얹혀 있는 것들 내 뒤에도 누가 붙어사는지 가다가 한참을 뒤돌아보는 사람이 있다 나의 뒤에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이 붙어사는 일 나는 그를 위해 밥을 주고 잠을 주고 노래를 준다 이다음 나는 풀잎의 뒤태로 살 것이다 돌아나가는 저녁연기와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가물치 등도 좋을 것이다 - 내가.. 2022. 1. 13.
갈급에게 [이병률] 갈급에게 [이병률] 그 산에는 절벽이 있다 그 절벽 끝에 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는 기도실이 하나 그 안에서는 절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서는 절대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갈구해서도 안 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제외한 기도만을 허락한다고 어둠이 안내한다 그것이 막막하여 숨을 쉬는 것조차 당신을 떠올리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해주는 절벽 끝 방에서 촛불을 켰다 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 세상에서 가장 갈급한 갈급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픈 자식을 두고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어머니일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는다. 내몸이 망가지고 부서진다 해도 자식만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오직 기도에 매달리는 어머니.. 2022. 1. 13.
옥춘 [이혜미] 옥춘 [이혜미] 다정에도 핏빛이 어리던 봄꿈이었을까 몸이 있던 봄을 기억하는 방식이었어 피가 너무 달아 어지럼증을 앓던 아 침, 주머니에 어린 새를 감춰두고 입을 다물면 끈적해진 숨이 붉게 물든 잇 몸을 타고 고여들었다 양말을 찾아 신고 뒤돌아서 기다렸지 투명한 무리들이 찾아와 국을 뜨고 과육을 베어 무는 소리를 개가 짖기 시작하면 일제히 시계를 바라보며 오래 된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홑이불을 덮고 자다 죽었다는 어린 조상을 우리는 사라진 것들만을 두려움 없이 사랑했으니까 퍼져나가는 단것의 무늬로 길흉을 점치며 예쁜 입술을 가지면 좋은 나라에 입장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아무리 베어 물어도 사라지지 않는 죽음을 핥으며 마음껏 달아지고 싶어서, 달라지고 싶 어서 몸을 벗을 수 있을까 색색으로 물든 이 작은.. 2022. 1. 7.
紫月島 [박수현] 紫月島 [박수현] 누가 서녘하늘을 紫月刀로 내리쳤나? 달을 바라보다 한 목숨 다 저물어도 좋겠다며 찰박찰박 모래밭을 걸어 나오는 여자 저 바다는 늘 천년 전이다 -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2013 * 경기도 화성에서 서쪽으로 가면 섬들이 제법 있다. 대부도가 있고 영흥도가 있고 더 서쪽으로 자월도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이다. 오백명 남짓 사는 섬이니 그리 크진 않겠지만 암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고 멋진 섬일 것 같은 느낌의 섬이다. 천년 전의 바다가 품고 있으니 찰박거리며 나오는 여자도 천년 전의 여자이겠다. 붉은 달을 보며 한 목숨 바쳤을 그 여자가 사는 자월도, 아직도 찰박찰박 그 여자가 걸어나오고 있을라나. 2022.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