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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안 국밥집 [엄원태] 골목안 국밥집 [엄원태] 한동안 점심으로 따로국밥만 먹은 적이 있었다 골목안의 그 식당은 언제나 조용했다 어린애 하나 데리고 언제나 방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느릿느릿 차려주는 쟁반 밥상을 나는 수배자처럼 은밀히 찾아들어 먹곤 했다 밥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의 그 적요가 왠지 나는 싫지 않았다 한번은 직장 동료와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을씨년스레 식은 드럼통 목로들을 둘러보며 그가 추운 듯 그 적요를 어색해 하는 것을 보곤 이후 죽 혼자만 다녔다 가끔씩 국이 너무 졸아들어 짜진 것을 빼고는 콘크리트처럼 딱딱한 채 언제나 적당히 젖어 있던 그 낡은 적산가옥의 쓸쓸한 흙바닥까지 나는 사랑하였다 그 식당이 결국 문을 닫고 아이와 함께 늘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 집수리가.. 2021. 10. 22.
슬픈 버릇 [​허연] 슬픈 버릇 [​허연] 가끔씩 그리워 심장에 손을 얹으면 그 심장은 이미 없지. 이제 다른 심장으로 살아야 하지. 이제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 하면 공기도 우리를 나누었죠. 시간의 화살이 멈추고 비로소 기억이 하나씩 둘 씩 석관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뚜껑이 닫히면 일련번호가 주어지고 제단위로 들어 올려져 이별이 됐어요. 그 골목에 남겼던 그림자들도, 틀리게 부르던 노래도, 벽에 그었던 빗금과, 모두에게 바쳤던 기도와 화장장의 연기와 깜빡이던 가로등도 안녕히. 보랏빛 꽃들이 깨어진 보도블럭 사이로 고개를 내밀 때, 쌓일 새도 없이 날아가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이름이 지워진 배들이 정박해있는 포구에서 명치 부근이 이상하게 아팠던 날 예감했던 일들. 당신은 왜 물위를 걸어갔나요. 당신이라는 .. 2021. 10. 21.
오달지다 [장은숙] 오달지다 [장은숙] 꽃눈이 나왔다고 다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꽃 피었다고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열매 맺혔다고 다 알이 굵어가는 것은 아니다 알이 굵다고 다 달게 익어가는 것은 아니다 산책길, 발등을 찧는 노랗게 익은 살구 한 알 쿵! - 그 여자네 국숫집, 북인, 2019 * 살구는 그리 많이 재배를 하지 않아서인지 사먹을 수 없고 짧은 기간 판매해서 어, 하는 순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아파트 살면서 살구나무를 키울 수는 없다. 찾아보니 비파나무가 살구 비스무리한 열매를 연다고 해서 재작년에 살구 묘목을 세 개 샀다. 생각보다 자라는 속도가 늦어 햇수로 삼년인데 겨우 두 뼘이 되었다. 아마 노지가 아닌 실내에서 키워서 그런 것 같다. 쿵!하고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십수 년 키.. 2021. 10. 21.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권혁웅]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권혁웅]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 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 같을 것이다 빙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 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 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시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 2021.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