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감상276 내 안의 느티나무 [고은수] 내 안의 느티나무 [고은수] 어제는 유순한 신발이었나, 의무는 계속 오늘, 오늘 그리고 맑아야 함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여름날은 무한해 보인다 변하지 않는 발자국들은 차례로 썩어갈 것이다 너는 내 말을 잘 들어서 마음에 들어, 이 페이지는 찢도록 하겠습니다 헐벗기를 자청하는 나에게 너는 또 푸른 갑옷을 입혀준다 - 모자를 꺼내 썼다, 달아실, 2022 * 어느 마을이든 입구에는 크낙한 느티나무가 있고 넉넉한 모습으로 그늘도 만들어주고 마음의 위안이 되어 준다. 마음에 들고 눈에 들고 해마다 비웠다가 채웠다,를 반복하며 변함없음을 깨닫게 해 준다. 친구들에게 보탑사의 느티나무가 '주페나무야!' 했더니 순례자처럼 보탑사를 다녀갔다. 늬들도 알잖아. 변함없이 잘 버티고 있다는 걸. 누구나 넉넉한 느티나.. 2022. 5. 1. 친밀한 타인 [채수옥] 친밀한 타인 [채수옥] 꼬치전을 만들었다 명절이므로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 지에 대파를 끼우고 햄을 끼우고 대파를 끼우고 맛살을 끼우고 대파를 끼우고 느타리버섯을 끼우고 커튼처럼 길 게 늘어뜨린 나뭇가지에 노을이 끼워지고, 모퉁이 뒤 빨 간 지붕이 끼워진 채 나란히 앉아 텅 빈 아버지 옆에 엄 마, 사이에 오빠와 나 옆에 동생들이 한 나뭇가지에 끼 워져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허옇게 흩날리며 미끄러지다, 계란 물에 몸을 적시고 눈물 콧물 흘리며 뜨거운 프라이 팬 위에서 지글지글, 징글징글 가늘고 얇은 나뭇가지 하 나 벗어나지 못한 채 한 줄에 꿰어 비좁은 옆을 탓하고 수상한 냄새를 역겨워 하며, 꿰뚫어진 서로를 증오하다 소식을 끊고 꼬치가 익어갈 즈음 한 줄이었음을 깨닫고, 한 줄을 원망하며 대파 다음 햄, .. 2022. 4. 28. 데자뷰 [박수현] 데자뷰 [박수현] 번개탄을 피워 겨우 구멍을 맞췄는데 열아홉 개 파란 불길이 날름대다 꺼지는데 아버지의 밭은 기침 소리가 들렸는데 불구멍 속으로 발소리가 몰려오는데 누가 매케한 연기를 내 얼굴과 온몸에 뿜어대는데 타이레놀 한 알이 녹아드는 동안, 얇은 습자지처럼 팔 다리가 너풀거려요 세모 네모로 접혀진 풍경들이 와삭거리며 뒤집혀요 종잇날에 베인 새끼손가락에 핏 물이 맺혀요 둥글동글 핏방울처럼 뭉쳐진 생각들이 멀리 먹물빛 바다로 흘러가요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높이 날고 싶어요 날갯짓 쳐보지만 어둠속으로 곤두 박질쳐요 타버린 연탄재 같은 눈빛들이 노려보고 있 어요 장독 위 살얼음 두른 하현달이 손톱을 오무려 텅 텅 내 머리통을 밤새 두드리고 두드려요 -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2013 * 봄은 쉽게 오.. 2022. 4. 25. 메주 [서하] 메주 [서하] 날더러 못생겼대요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누구나 조금씩은 못생긴 부분들 감추며 살지만 적어도 난 겉 다르고 속 다르지는 않아요 긴 콩밭 이랑 사이 불쑥불쑥 말 걸어오는 잡풀 하나 아는 체하지 않은 고집 때문에 절간의 목어처럼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야 한대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동안 틈새 쩍쩍 갈라지는 일들 많지만 때로는 훈훈한 바람 만나 속 열어 보이며 적당히 자신을 익힐 줄도 알지요 봄을 준비하는 사람은 봄보다 먼저 발효되어야 한대요 - 아주 작은 아침, 시안, 2010 * 요즘 단어를 축약해서 쓰는 게 유행이지만 우리 어릴 때에도 우스갯소리로 줄임말이 있었다. 못생겼다는 표현을 옥떨메!라고 했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는 말이다. 얼마나 못생겼길래... 다른 표현으로는 무주구천동이.. 2022. 4. 25.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69 다음